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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프나] 파도치지 않는 바다

그럼에도 푸르름은 영원하기에


:: BGM - Perfect Blue / Dj Okawari

 

 

 

 

 

 

 

 

새겨진 두 이름에 녹색 흠집이 자라나고

 

이름보다도 깊게 파인 영원이라는 마디를 훑어

 

나는.

 

나는, 그 아래 굵게 그어진 밑줄이 되고 싶었다.

 

 

 

 

 

 

 

언젠가 바다가 보고 싶다는 리프나의 말에, 답답한 오두막을 벗어나 단 둘만의 여행길을 위해 장대한 계획을 짠 적이 있었다. 바닷물은 전혀 가까이하고 싶은 존재가 아니었겠지만, 클러치는 나름 귀여웠던 그 짧은 목소리를 이뤄주고 싶어서 그런 마음에 섣부른 약속을 걸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문명을 잃은 생활이 큰 골칫거리로 다가왔으나, 저녁마다 화톳불 앞에 앉아 머리를 맞대어 고민하던 시간은 하나의 단순한 소망으로 시작했을지라도 그 둘에게 새로운 일상을 맛보게 해준 더없이 소중하고 뜻깊은 기억이 되었었다.

 

긴 여행길에는 그만큼의 여정을 받쳐줄 충분한 식량이 필요했기에. 클러치가 사슬로 물고기와 작은 소동물들을 쥐어 잡았고, 리프나와 함께 덩굴을 엮어 만든 망에 그것들을 곱게 말려 어포와 육포를 만들었다. 그중 몇 개는 클러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돕겠다며 따라나선 리프나의 어설픈 앞발질에 붙잡힌, 어찌 보면 참 가여운 희생양들이었다. 어쩌면 수천 번의 헛발질을 감내한 리프나의 집념에 탄복하여 스스로를 바친 이들일 수도 있을까. 맛을 보겠다며 바짝 마른 살점을 질겅질겅 물어뜯는 리프나의 모습에 그에 대한 생각은 티끌조차도 깃들어 있지 않은 듯 했지만. 확실한 것은 그때 리프나의 얼굴이, 다 태운 고기를 바라보며 뒷걸음질 치던 그 시절의 표정과 겹쳐보아도 다름이 없었다는 점. 그 점이 마냥 웃기만 하던 클러치의 속눈썹에 아련한 무게를 얹어줄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둘의 이름 위에 한겹 두겹 쌓여가 햇살과 달빛을 순식간에 넘나들었다. 나뭇잎으로 식량을 넣을 덩굴 가방을 만들고, 가죽으로 새벽이슬을 맞이할 이불을 만들고, 밤하늘과 기억 속의 지도에 의존해 향해야 할 방향을 가늠하고, 발걸음에 지쳐 투정부릴 리프나를 위해 미리 클러치의 등가에 올라타보기도 하고, 이야기의 끝에 마주하게 될 바다는 푸른 향기를 머금었을까 궁금해하고.

 

여정을 떠나기 바로 전날, 쏟아지는 은하수 아래 하품하며 내일을 기대하는 대화를 나누던 중 리프나가 문득 그런 말을 꺼냈었다.

 

"있잖아요 언니, 바다는..."

 


 

꿈 얘기를 들려달라는 리프나의 말에 그냥 악몽이었다며 둘러대던 클러치는, 하나 남은 하얀 열매를 집어 들어 리프나의 입에 넣어버린다. 괜한 걱정으로 차오른 리프나의 얼굴을 마주해서 꿈의 내용을 말할 수 없었지만, 그보다는 꿈의 내용을 자세히 풀다 보면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을 쏟아낼 것만 같았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런 모습은 클러치답지 않다고 생각해서 되려 익살스러운 말투로 리프나의 귓가를 간지럽히곤 품으로 끌어와 푸른 하늘 아래 드러눕는다. 끌어안은 자세가 불편했던 건지 냐악 하는 소리와 함께 발버둥을 치던 리프나는 몸을 돌려 품 위에 엎드리곤 클러치를 빤히 바라본다.

 

"그럼 언니,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만 알려줘요."

 

"생각? 음- 그 하얀 열매는 대체 어디서 따온 건 지 궁금한데."

 

클러치를 바라보는 리프나의 시선은 무언가 의심이 가득했다. 클러치가 본인의 짐을 이겨낸 뒤론 좀처럼 꾸지 않던 악몽을 꾼 것이 리프나에겐 새삼스러웠을까?

 

"하지만 지금 언니 표정이...... 마치 지난 악몽을 꾸던 그때처럼 어두운걸요."

 

클러치는 그제서야 제 입꼬리가 굳어있음을 깨달은 듯 앞발로 제 입가를 매만지곤 작게 한숨을 쉬었다. 벗어던진 과거의 짐은 더이상 클러치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았지만......

 

"하... 조금은 현실적인 꿈을 꿔서 그래. 멀고도 먼 훗날에 일어날 일이지만, 우리의 삶이 언제까지고 영원할 수는 없는 법이잖아."

 

앞발로 감은 눈꺼풀을 짓누르며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젓던 클러치는 제 품 위의 리프나를 옆에 내려주곤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린다.

 

"괜한 걱정이지. 그런 걸 꿈으로 꿔서 좀 같잖긴 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으니까 괜찮아. 오히려 난 이런 얘기를 리피가 들었을 때 울상지으면 어쩌나 더 걱정됐는걸?"

 

잔잔한 바람이 둘 사이의 잔디밭을 쓸어낼 동안 리프나는 가만히 앉은 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클러치가 설마 정말로 울고 있나 싶어 고개를 들었음에도 리프나는 울기는커녕 무언가 의연한 표정이었다.

 

"......언니, 우리가 바다에 놀러갔던 날을 기억해요?"

 

"바다라니? 갑자기 왜... ... ...아."

 

"그 때 언니가 했던 말, 그대로 돌려드리면 될 것 같죠?"

 

 

소금기를 머금은 바다내음이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따라 은은하게 흘러 퍼지고 있었다. 수면에 걸린 달을 바라보던 둘은 모닥불 앞에서 서로에게 고개를 기울인다. 대낮부터 모래사장에 수많은 발자취를 남기고, 그 어느 때보다도 털을 바짝 세운 채 바닷물에 닿기 싫어하는 클러치에게 물장구를 쳐대기도 하고, 모래밭을 거닐던 클러치가 바닷게에게 앞발을 물려 비명을 지르는 리프나에게 벼락같이 달려와 그 바닷게를 아주 깔끔하게 '처리' 하기도 하고.

 

그렇게 수많은 추억을 쌓았던 만큼 지칠 대로 지쳐버린 둘에게 부드러운 모래밭은 우주를 천장으로 둔 드넓은 침대와도 같았을 것이다. 그 풍경 아래에서 감상에 젖어가던 둘은 문득 동시에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언니."

"있잖아 리피."

 

각각 하늘과 바다에 향해있던 시선이 서로를 향해 돌아간다. 잠깐의 정적이 찾아오고 나서야 둘은 살풋 웃음을 터트린다. 웃은 뒤에도 서로가 먼저 말하라며 옥신각신하는 분위가 짧게 흘러갔지만.

 

"언니, 우리가 출발하기 바로 전날 밤에 했던 얘기 기억해요?"

 

"음- 기억하지. 그때 내가 리피다운 생각이라고 말하기도 했었고?"

 

"냐악, 나름 진지한 얘기였다고요!"

 

찰그랑, 맑은소리와 함께 클러치의 사슬이 리프나의 손에 붙잡힌다. 클러치는 그저 웃기만 하며 곧 그걸 세차게 흔들어댈 리프나를 가만 바라보기만 했다. 어차피 네가 불만을 표출할 때 흘러나오는 그 귀여운 모습은 매일 봐도 질리질 않았으니. 

 

"..."

 

하지만 리프나는 들었던 사슬을 다시 얌전히 내려놓곤 맨 처음에 흘러나왔던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간다. 모래알을 훑는 파도 소리가 곁들여져, 더욱 잔잔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바다는 물고기를 잃더라도 항상 그곳에 그대로 있을 수 있잖아요. 변함없이 파도를 일으키고, 변함없이 모든 것을 가라앉히고. 물고기는 영원할 수 없다 해도 그 바다에 가라앉을 수 있어서 행복했을 거에요. 바다도 그 물고기를 머금을 수 있어 행복했을 테고요. 바로 눈앞에 있는 이 바다도, 그렇지 않을까요?"

 

어려운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때 클러치가 리피다운 생각이라며 흘려 넘겨버린 것도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마땅한 말을 떠올리질 못해서였다. 그러나 지금은 똑같은 대답으로 그 말을 흘려버릴 수가 없을 것 같았고. 애초에 그 흘려넘긴 대답 때문에 리프나가 한 번 더 이런 얘기를 꺼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렁이던 파도가 순간 고요해진다. 물기를 머금은 모래가 점점 말라간다. 지평선에 잠기는 달이 깨끗한 수면 위에 한줄기 파동을 일으킨다.

 

파도치지 않는 바다는, 파도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일까. 아니면 품었던 무언가를 잃어 파도를 일으킬 수 없게 된 걸까.

 

"바다는 어째서 바다로 남아있어야만 했던 걸까. 파도가 일렁이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그건 그 바다에 물고기가 살고 있었기에 그랬던 것 아닐까. 바다는 절대로 스스로 일렁이지 않아. 다른 이가 놓아준 파동을 세상 끝까지 짊어지고 갈 뿐이겠지. 일렁이지 않는 바다는 잔잔한 호숫가와도 다를 바가 없는데, 그건 바다라고 부를 수 있을까."

 

클러치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지난날에 평생을 약속하며 지었던 표정을 자신의 얼굴에 겹쳐 보인다. 홀로 떨어져나온 작은 이파리가 상처 입을 것을 걱정해서, 본인이 짊어진 짐을 내려두는 것이 무서워서, 하마터면 홀로 말라가도록 내버려 둘 뻔했던 지난날이 흘러간다. 그 순간을 후회하며 악물었던 입은 이제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네가 나에게 가라앉기를 택해서, 나는 너를 머금어주기로 마음먹어서. 그 둘은 지금 누구보다도 행복한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으니까.

 

"바다는 바다일 수 있을 때 행복하겠지. 그럼 지금 저 바다도 결국 행복한 거고. 물고기에게 영원이 존재하지 않아서 파도가 멈춘다면, 그땐 바다도 바다가 아닌 거지. 그러면 그들은 행복했던 순간만을 머금은 채 세상에 영원한 푸름을 남기고 사라지는 거야. 제법 아름다운 결말이겠지. 중요한 점은, 그들은 그 결말을 단 한 톨도 걱정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 아닐까? 왜냐면 지금이 행복한 이들이니까."

 

고요했던 파도가 다시 모래밭을 적시기 시작한다. 일렁이는 파도에 잠긴 달빛이 산산이 조각나 흩뿌려진다. 서로를 마주하고 있던 두 시선에 은은한 빛이 감돌아 환한 미소를 더 밝게 만들어 주는 듯 했다. 리프나가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클러치가 앞발을 들어 막더니 또 한 번 입을 연다.

 

"이젠 내가 하려던 말 해야 할 차례잖아?"

 

클러치가 앞발 한쪽을 뻗어 리프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항상 하던대로의 방식 그대로였지만 이번엔 쓰다듬의 끝에 앞발을 내려 리프나의 턱을 받치곤 작게 읆조린다.

 

"그냥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어. 왠지 이런 분위기에서 하면 멋져보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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